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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르신과의 추억 하나

  • 등록일 : 2021-06-30
  • 작성자 : 생활지원사 손명자
  • 조회수 : 177


거 누꼬? 오지 말라캤디 말라꼬 또 왔노?”

대문을 들어서는 나에게 짜증 한 움큼 섞인 어르신의 목소리가 먼저 반긴다.

어르신, 잘 지내셨지요? 오지 말라칸다꼬 안오만 됩니까? 우리 엄마 말도 안듣고 컸는데

어르신 말씀을 잘 들으면 안되지예

나도 이제는 제법 능숙하게 능구렁이 한 마리 갈아 먹은 듯 넙죽 대답을 한다.

 

여 앉겠거등 앉든가, 말라꼬 또 왔노, 내 안와도 된다카이

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부정적인 단어뿐이지만 어르신의 눈가에 웃음은 숨길 수가 없다.

 

나이 50에 인생 2막을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참 생활지원사의 첫 시작.

어르신과의 첫 만남이 있었던 그 날은 잊혀지지 않는다걱정과 설레임으로 가득한 초보 생활지원사인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날 아침이다.

대문도 열어주지 않으시고 전화도 끊어버리시곤 방문한 나를 돌아가라고만 하셨던 그 날.

지난번에 담당하셨던 선생님과 정이 쌓여 마음을 주고 받았는데 별안간 다가온 낯선 나의 모습은  참 어색하셨나보다신참티 내지 않으려 과장된 인사를 건네는 나의 모습에 어르신께서 보내신 눈빛은 본부인 자리 꿰찬 여시를 보는 눈빛 이였다고나 할까?

 

그렇게 어르신과의 인연은 시작되었고 어르신께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전화로 안전 및 안부를 확인하고전화를 받고 끊어버리시면 무작정 대문 열고 들어가서 말벗이 되어 드리고집에 계시지 않으면 마을 회관으로, 텃밭으로 찾아다니기를 두 달쯤 하던 어느 날,

얼음과자 한 개 먹을라 카나?”

툭 던지듯 내어주시는 손에는 막대 아이스크림이 하나 들려져 있다.

어르신 이거 저 주실려고 사다 놓으신 거예요?”

묵겠거등 묵든가

 

어르신의 화법은 이제 내 손아귀에 들어있다.

이거 필요 없다 치아라고맙다 말라꼬 이런 걸 다 챙겨주노 라는 뜻이고,

귀찮구로 말라꼬 오노자주 와줘서 고맙데이라는 뜻이다.

 

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세상이 시끄럽던 가운데 어느 방문 날이었다.

입맛이 없어가 국수 한 젓가락 묵을라칸다. 선생도 한 젓가락 해뿌라

어르신 식사 못하셨어요? 저는 괜찮습니더. 어르신 드세요

시끄럽다 마, 들따 앉아뿌라, 묵겠거등 묵든가


이미 국수는 불을 만큼 불어버려 한 덩어리가 되었지만 묵겠거등 묵든가라는 말은 마법사의 주술문과 같아서 절대 거역할 수 없는 힘이 들어있다.

함께 먹자는 어르신의 응석에 식사를 마치고 나니 누렇게 변해있는 사과 한쪽도 내미신다이쯤 되면 나의 방문을 기다리며 준비해둔 것이란 걸 알아차리고야 만다. 비록 퉁퉁 불은 국수와 색이 변해버린 사과였지만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어르신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져왔다.

 

젊어서부터 온갖 고생으로 손가락까지 잃었다는 어르신은 마당에 핀 잡초 하나 허투루 여기지 않으시고 물건 하나 버리는 것을 끔찍이도 힘들어하시는 분인데 나를 위해 가스불을 지피고 물로 몇 차례나 헹궈서 삶아 내셨을 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이제 어르신과 제대로 라포 형성이 되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.

 

매일 매일 수수께끼 풀어나가듯 했던 어르신의 화법을이젠 퍼즐을 맞추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다 알아 듣던 무덥고 습한 어느 날.

어제 밤에 밤새 시끄러버가 잠 한숨 못잤데이.

누구네 집 아들이 죽어가 밤새 곡소리에 비는 쏟아지고 아이구야, 큰일이데이, 사람 여럿 실려 나가든디” 유독 죽음에 관련된 일을 무서워하고, 망상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보호자 분의 염려가 무색하게도 어르신의 상태는 점점 더 심해져만 가고 있다.

 

알록달록 단풍이 한창 이쁘던 날 어르신은 장기요양등급 자격을 취득하여 요양보호사의 도움이 필요한 장기요양 서비스 대상자가 되었다.

선생님, 어머니가 오늘도 요양보호사 선생님을 쫓아내셨어요.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..”

선생님, 죄송한데 우리 어머니께 요양보호사 선생님하고 잘 지내시도록 말씀 좀 해주세요.”

선생님, 어머니가 도대체 왜 그러셨대요?”

함께 살면서 돌봐 드릴 수 없는 보호자는 애가 닳아서 전화를 주신다.

 

요양보호사 선생님이시죠? ooo어르신은요....”

나는 요양보호사 선생님께 어르신에 대해 세세히 알려드린다뒤늦게 시작한 생활지원사의 시작이 어르신과의 만남으로 이제 이 일은 나에게 직업을 넘어 사명감이 생긴다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.

내 자식, 내 남편, 내 가족만 알고 지내온 내가 깊은 생각에 빠질 줄이야 더욱 생각하지 못했다.

요즘 세대들은 혼밥, 혼술, 혼공 등 일부러 혼자만의 시간을 즐긴다고 한다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즐거움이 아니라 외로이 버텨내야하는 많은 어르신들에게는 어떤 도움을 드려야 할까 고민에 빠지는 요즘이다.

 

어르신이 조금 더 건강히 조금 더 천천히 각자에게 주어진 생의 주기를 건강하게 이어나갈 수 있기를 희망하는, 노년의 시작을 함께 하는 나는 자랑스러운 생활지원사다

요즘도 다른 대상자 방문을 하는 날에는 어르신 집 앞을 지나게 된다오늘은 잘 지내고 계실까?’ 라는 생각에 그 집 앞에서는 문득 발걸음이 느려진다.

혹시나 나는 어르신이 괜찮아져서 다시 만나게 될 날을 어쩌면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오늘은 왠지 어르신의 화법이 유난히 그립다.